로마 원로원 Curia Julia

흔히 원로원 Curia Julia 하면 로마 공화정을 떠 올릴 정도로 우리들의 귀에 익숙하지만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원로”는 말 그대로 나이 많은, 늙은 사람을 뜻하죠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귀족 중에서 나이 많은 사람 100명을 뽑아 그들의 지혜와 경험을 듣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받던 하나의 기구였고요

원로원은 이런 원로들이 모여서 회의하던 장소로 쿠리아 Curia라고 불렀습니다

원로들은 세나투스 Senatus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는 현재는 상원의원을 뜻하는 세나토 Senator가 되었습니다

역사

지금 보시는 건물 이전에도 원로원 건물로 쓰던 것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세 번째 왕인 호스틸리우스가 만든 쿠리아 호스틸리아 Curia Hostilia가 이곳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만 기원전 52년에 폭동이 일어나 불에 타버렸죠

그 후 시저가 자신의 개인 포럼을 만들면서 원로원 건물을 다시 큼지막하게 지으라고 명령하죠 여러분 보시는 이 건물이 바로 시저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던 바로 그 원로원입니다

그래서 이 원로원의 이름을 율리우스 시저의 이름을 따서 쿠리아 율리아 Curia Julia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44년 시저는 암살을 당했기 때문에 이 건물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양아들이었던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9년에 완성 했습니다

로마시대 최대의 영웅인 시저에 대해선 몇일 동안 이야기 해도 모자랄 만큼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대략 생략하고요

간혹 시저가 암살당한 곳이 이 원로원 건물인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시저는 이곳이 아닌 근처에 있었던 폼페이우스 극장 로비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시저의 죽음

문헌에 의하면 시저의 암살에 가담한 원로원 의원들은 거의 60명이나 되고 시저는 23군데나 단도에 찔려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이 찔렸지만 사실 시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가 치명적으로 시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하죠

시저가 23번째 칼에 찔린 후 남겼던 유명한 “부루투스 너마저도!”라는 말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실 시저는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요 이 말은 영국의 대 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율리우스 시저”라는 희곡에 나오는 대사라고 하죠

꼭 우리나라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이 했던 “마이 묵었다!”라는 대사랑 비슷하죠?

건물

정면에 보이는 세개의 창문과 정면의 청동문이 있는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안에서보면 천정까지 높이가 21미터 밑 면의 길이는 27미터 폭은 18미터의 텅빈 공간입니다

이렇게 천정을 높게 만든이유는 아마도 음향과 관계가 있을거라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사실 볼게 거의 없지만 여러분이 주목해야하는 것은 바닥입니다

요즘도 흔히 보는 것과 비슷한 타일이 깔려있는 바닥은 2000년전에 만든 그대로 지금까지 내려오는 오리지날입니다

그리고 바닥의 타일같아 보이는 바닥재는 타일이 아니고 색깔이 있는 대리석 조각들이랍니다

그리고 오리지날 입구의 청동문은 라테란의 산 조반니 성당 입구에 가져다가 문으로 쓰고 있고 지금 보시는 분은 그대로 복사해서 만든 가짜입니다

공화정과 재정

양쪽에 원로들 300명이 앉을 수 있었어요 그 당시 원로의 수가 300명이어서 인원에 딱 맞춰서 만든겁니다

나중에 600명으로 늘어나고 900명까지 늘었다가 아우구스투스가 600명으로 고정시켜버렸죠

사실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로마가 황제들의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에 원로의 숫자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의 의결을 집정관이 대행하는 체재라 원로원의 역할은 무척이나 중요했습니다

시저는 이런 원로원을 무척이나 우대하는 척하면서 원로원의 정원을 300명으로 늘려 버렸는데요

이는 원로원 의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아 이를 핑계로 집정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들기 위한 꼼수였죠

아무튼 시저는 정말로 머리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쇠퇴

29년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완공한 원로원은 94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한차례 복원하고 283년 대 화재 때 소실된 것을 디오 클레티아누스 황재가 다시 재건합니다

그 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계속 사용하다가 630년에 호노리우스 교황님의 명령으로 성당으로 사용합니다

그 후 계속해서 성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원형을 잘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